[세상 읽기 칼럼]
가난한 사람에게 투자하지 않는 자본주의는 무너진다
자본주의의 회복은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된다
[고재철 박사 칼럼]
자본주의가 무너지고 있다는 경고는 낯설지 않다. 그러나 그 위기를 진단하고 해법을 제시하는 방식은 제각각이다. 미국의 금융교육 운동가 존 호프 브라이언트는 『가난한 사람들이 어떻게 자본주의를 구하는가』에서 매우 다른 관점을 내놓는다. 그의 주장은 명확하다. “자본주의가 위기를 맞은 이유는 가난한 사람들이 시스템에서 배제됐기 때문이며, 그들을 다시 초대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이 책은 한 개인의 고백에서 시작된다. 저자 브라이언트는 미국 빈민가에서 태어나 가난을 딛고 일어선 인물이다. 그는 단순히 경제이론을 설파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체득한 실천적 경험을 바탕으로 주장을 펼친다.
![(사진) <strong>[세상 읽기 칼럼] </strong>자본주의의 회복은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된다](http://www.ksen.co.kr/data/photos/20251040/art_17596439942037_99f59f.png?iqs=0.6998714000609582)
그가 강조하는 키워드는 ‘금융문맹(financial illiteracy)’이다. 많은 빈곤층은 신용카드, 예산, 저축의 개념조차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출발선부터 뒤처진다. 이 무지는 다시 ‘신뢰 결여’로 이어지고, 신용점수가 낮아 대출이 불가능해지면서 사회로부터 철저히 고립된다.
문제는, 이들에게 그 어떤 제도도 다시 시작할 기회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본주의는 실패한 사람에게도 두 번째 기회를 줄 수 있는 시스템이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신용 없는 자에겐 기회도 없다”는 냉정한 질서로 변모했다. 브라이언트는 이 구조를 비판하며, 자선이 아니라 ‘기회 제공’을 해법으로 제시한다.
그는 말한다. 자산은 없지만, 가난한 사람들도 이미 경제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노점상, 미용사, 트럭 운전자, 일용직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의 최전선에 서 있다. 하지만 이들의 경제활동은 제도권에서 포착되지 않으며, 투자도 받지 못한다. 브라이언트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실질적인 금융교육이라고 주장한다. 예산 수립, 신용 회복, 지출 관리, 그리고 소규모 창업까지 포함한 전방위적 교육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경제 민주화라는 것이다.
이 책이 주는 함의는 정책적인 측면에서도 깊다. 복지냐 시장이냐의 이분법을 넘어서야 한다. 브라이언트는 복지의 탈중앙화, 학교 내 금융교육 강화, 지역 기반 마이크로 파이낸스 도입 등을 미국 현장에서 이미 실현해내고 있다. 이는 한국 사회에도 유효한 화두다. 우리는 여전히 ‘복지는 비용’, ‘시장은 효율’이라는 낡은 구분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에게 투자하는 자본주의, 기회를 회복하는 경제시스템을 설계할 때다.
이 책의 진짜 울림은 가난한 사람들을 변화의 주체로 바라보라는 데 있다. 그들은 단지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다. 소비자이자 생산자이며, 성장의 주역이 될 수 있다. 브라이언트는 이렇게 묻는다. “그들에게 한 번이라도 투자해본 적이 있는가?” 이 질문은 자본주의가 자초한 단절의 역사를 비추는 거울이다. 이 거울 앞에서 우리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해야 한다.
덧붙여 브라이언트는 ‘신용’과 ‘교육’, ‘기회’라는 연결고리가 끊어진 사회는 결국 스스로 붕괴한다고 경고한다. 자본주의는 숫자로만 굴러가는 구조물이 아니다. 인간의 가능성을 신뢰하는 시스템이다. 그러나 그 신뢰가 사라졌을 때, 자본주의는 가장 먼저 약한 고리부터 무너진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경제 구조’로만 이해하려 한다. 하지만 이 책은 구조 안에 놓인 ‘관계’를 주목하라고 말한다. 신뢰를 복원하고, 교육을 강화하며, 기회를 보장할 때 자본주의는 인간적인 얼굴을 되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가장 낮은 곳에 있다.
가난한 사람을 사회적 부담이 아니라 자본주의 재건의 파트너로 바라볼 수 있을까. 2025년을 살아가는 오늘, 이 책은 우리 사회가 던져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을 남긴다. 자본주의는 구조보다 사람이 먼저여야 한다. 희망은 끝이 아니라 시작에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우리가 가장 오랫동안 외면해온 그곳에서부터 가능하다.
kjc816@naver,com
고재철 경제학 박사
한국사회적경제신문 발행인
한국사회적포럼 대표
전 가천대, 안양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