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이 된 임광순 형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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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이 된 임광순 형을 생각하며

대한민국 정치계에 몸 담았던 수많은 사람 중에서 가장 재치 있고 유머러스한 표현으로 청중을 울리고 웃기는 ‘말 잘하는 선수’가 누구냐 하면 많은 이들이 ‘임광순’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이건 나 혼자서 하는 얘기가 아니고 그의 친구, 동료, 선배, 후배 등 그를 아는 사람들은 임광순을 엄지로 치켜드는데 인색함이 없다. 그만큼 그의 연설 솜씨는 좀 특별했다. 연설은 말만 잘 한다고 청중의 관심을 끄는 것은 아니다.

목소리, 표정, 내용은 물론 음성의 고저와 유머를 구사하는 것은 필수다. 웃겨야 할 대목에서는 그에 알맞은 표정과 내용이 전달되어야 하고 울리고 싶으면 목소리까지 처량해지면서 연설내용이 어울리지 않으면 청중은 냉정하게 토라진다. 청중이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 다음에는 아무리 붙들고 싶어도 돌아오지 않는 게 청중이다. 처음부터 이탈하지 않고 나의 연설에 집중시킬 수 있으면 그것은 연설자의 치밀한 계산이 적중해야 되는 것이다. 이것을 제일 잘 하는 사람이 명연설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 사람의 하나가 임광순이다.

임광순은 나보다 2년 선배였지만 수십 년을 두고 친구처럼 지냈다. 그러나 선후배 예절은 깍듯해서 언제나 ‘형님’이었고 나를 동생처럼 아꼈다. 그는 전주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배재고를 다녔는데 중앙대를 나온 후에도 동창회는 전주북중31회 전주고교34회 동창회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동창친구들은 기꺼이 형을 환영했고 그를 둘러싸고 얘기를 하다보면 언제나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그의 입담은 거침이 없었다. 어떻게 옛날 얘기를 기억해내는지 알 수 없지만 시시콜콜한 이미 잊어버렸던 얘기들이 그의 입에서 나오면 모두 박장대소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감추고 싶은 얘기도 서슴없이 꺼내는 재주가 남달랐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남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을 법한 말인데 모두 웃었다. 한마디로 끝마무리가 뛰어났다. 그래서 친구가 많았다. 그 친화력을 바탕으로 정치에 몸을 담고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가 감옥에 갔다. 많은 이들이 걱정해줬지만 정작 그는 “정치하면서 감옥 한 번 안 갔다 오면 나를 사꾸라라고 하지 않겠어?” 하면서 웃으며 들어갔다.

전두환정권의 막바지에 민주화추진협의회가 조직되었을 때도 남들이 주저하는데 그는 앞에 서기를 머뭇거리지 않았다. 내가 긴급조치다, 내란음모 사건이다 하면서 교도소를 들락거릴 때에도 “자네는 내 대신 들어간 것 아닌가?” 하면서 위로했다. 임광순형은 말도 잘했지만 글 솜씨도 수준이상이었다. 정계의 후배로 전영호라는 동지가 있었다. 대전출신으로 원래 권투선수였다. 이기택총재의 경호를 도맡았던 강인한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떴다. 어제까지도 만나서 “형님 술 한 잔 합시다.”하던 동생의 허무한 죽음이었다.

그 때 우리는 민주동우회라는 조직으로 뭉쳐 있을 때다. 강창성의원이 이기택총재를 대리하여 회장을 맡고 있을 때다. 메디컬 센터에 빈소를 차리고 장례식은 내 제안으로 ‘민주동우회장’으로 결정했다. 나는 광순형에게 조시(弔詩)를 써서 낭독해달라고 부탁했고 그는 서슴없이 응락했다. 영결식장은 동지 1백여 명이 참석하여 숙연한 분위기였다. 초종절차를 모두 끝내고 조시를 낭독하는 시간 내내 참석자들은 모두 흐느꼈다. 연설 솜씨보다 조시낭독 솜씨기 훨씬 뛰어났다고 나중에 풍성한 평가가 내렸다.

임광순형은 몇 권의 저서도 냈는데 그 중에서도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나는 졸이로소이다’다. 그는 야심차게 이 책을 냈다. 내가 “아니 형은 창피하지도 않소? 배짱 좋게 나는 장이다 라고 해야지 졸이 뭐요?” 했더니 “아, 이 사람아. 국회의원 한 번 못해본 사람이 장이라고 하면 남들이 웃네. 졸이 나한테 어울려.” 나는 이 말을 듣고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출마할 때마다 패배의 고배를 마셨던 동병상련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정치판에서 줄서기를 잘 하거나 공천헌금을 많이 하면 유리할 텐데 그럴 형편이 못되었으니 밀리는 수가 많아 눈물을 머금고 물러나야 했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순간이다. 스스로를 ‘졸’이라고 낮췄지만 그의 자존감은 결코 졸이 아니었다. 누구 앞에서도 당당하게 자기주장을 펼 수 있는 배짱과 비전을 가졌던 임광순이었다. 그랬던 광순형이 우리 앞에 갑자기 사라진 것은 10여년이나 됐을까. 들리는 풍문에 실어증으로 고통을 받는다는 얘기였다.

아는 이들이 모이면 모두 걱정을 했지만 고생하는 분을 찾는 것도 자칫 예의가 아닐 듯싶어 연락을 끊고 살았다. 다만 그의 장남이 프랑스 소로본대에서 영화감독을 전공하고 둘째는 서울대를 나와 하바드대를 갔다는 얘기는 진즉 들었지만 그 뒤 소식은 감감했다. 오랜 병수발을 하던 형수 최여사가 두어달 전에 형보다 먼저 세상을 떴으니 사랑하는 아내의 뒤를 따라간 게 틀림없다. 저 세상에 가서도 옛 친구들과 어울려 특유의 유머로 많은 이들을 위로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보니 차마 명복을 빈다는 이야기가 허사(虛辭)가 될까 싶다.

 

전 대 열 대기자. 전북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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